작성일 : 24-02-26 11:37
[서의동 칼럼] 어떤 다큐의 ‘역사 거꾸로 세우기’
 글쓴이 : 행복이 (121.♡.9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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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은 미·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립은 불가능하므로 무력투쟁은 쓸모없다고 여겼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서구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 미국 여론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했고, 윤봉길·이봉창 의거가 일본의 탄압만 초래할 것이라는 항의서한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일본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안온한 미국 땅에 줄곧 머물렀던 이승만은 전 가산을 처분한 뒤 간도 땅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회영이나 홍범도·김좌진, 의열단의 시련을 알 턱이 없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돼 독립운동에 합류할 기회가 있었지만 현지에 잠깐 체류했을 뿐, ‘나는 외교를 할 테니 독립투쟁은 알아서들 하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주로 해온 것은 청원 외교였다. 1920년 미국 사회에서 아일랜드 독립투쟁에 관심이 커지자 이승만은 아일랜드 독립 결의안에 편승해 한국도 독립시켜달라고 미 의회에 청원했으나 부결됐다. 생소한 아시아의 식민지 한국이 1916년 ‘부활절 봉기’로 시작해 처절한 독립전쟁으로 영국을 압박해온 아일랜드와 동렬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1921~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려던 계획도 참가국들에 의해 묵살됐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는 ‘해방 후 신탁통치안’처럼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자는 청원서를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독립운동 노선뿐 아니라 재정권을 둘러싼 갈등과 불화로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됐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 충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승인’ 외교를 위해 이승만을 복권시켰으나 그는 되레 임정의 뒤통수를 쳤다. 샌프란시스코 회담(1945년 4~6월) 기간 이승만은 ‘미국과 영국이 얄타 회담에서 한국을 소련의 세력권에 양도했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연합국 주축인 미국과 소련을 싸잡아 공격하고, 중국 국민당 핵심인사 쑹쯔원이 한국과 만주를 소련에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미 국무부가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인정하지 않은 데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 ‘원맨쇼’로 이승만은 미국 군부 내 반소·반공 세력의 주목을 받았고, 그 대표 격인 맥아더의 도움으로 조기 귀국해 ‘하루가 다른’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이승만이 손잡은 한민당 친일세력들은 권력기관을 장악해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뒤 군대를 동원해 헌법을 뜯어고치며 12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이나 반민특위 해산,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 이승만의 악업은 다 열거하기 힘들다. 그나마 공적이라고 할 농지개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도 그의 수많은 과오들을 덮을 수는 없다.
현 집권세력과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반대세력을 용납지 않는 아집과 독선은 그와 판박이다. ‘운동권 청산’을 내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한동훈과 독립투쟁을 멸시한 이승만은 심리적 연결점이 엿보인다.
백번 양보해 이승만을 인정하려면, 선열들의 투쟁이 독립의 인스타 팔로워 구매 밑거름이 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에 감동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 추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사태를 보면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전쟁이 ‘빌드업’되고 있는 한반도
윤 대통령 자체가 외교의 리스크다
메가시티보다 지역정당이 우선이다
최근 개봉된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며 역사적 평가가 끝난 그를 다시 세우려는 보수우익들의 인스타 팔로워 구매 안간힘에 경악했다. 다큐는 이승만이 한국전쟁 직후 ‘서울시민 여러분 서울을 지켜달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며 CIA가 감청한 라디오 연설문을 공개한다. 하지만 본질은 똑같다. 대전으로 피란한 이승만의 방송 연설문은 모든 시민이 (중략)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하여 차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맺는다. 방송을 들은 국민 상당수가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줄 알고 피란 보따리를 풀었을 것이다. 다큐에는 심지어 ‘1959년 재일동포 북송사업 등 국제정세 변화가 이승만의 대통령 4선 도전의 계기가 됐다’는 견강부회도 등장한다.
이승만 집권기간 추종자들은 남산과 각지에 동상을 만들었으나, 4·19 직후 시민들은 동상을 부순 뒤 목에 끈을 묶고 끌고 다녔다. 이것이 당대 국민들이 내린 평가였고, 학계가 축적한 연구 결과도 다르지 않다. 그를 다시 기리는 것은 독선과 반칙, 불의와 기회주의가 승리한다는 교훈을 심어줄 뿐이다. 역사를 이렇게 거꾸로 세워도 되는 건가.